[서평] 무진기행
내가 요 몇 시간 동안 만나고 있던 것은 숙이가 아니라 무어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모를 어떤 것, 나에게서도 조금은 나왔고 숙이에게서도 조금은 나왔고 의자에서도 조금은 나왔고 탁자에서도 조금은 나왔고 레지에게서도 조금은 나왔고 잠바에게서도 조금은 나왔고 음악에서도 조금은 나왔고 커피에서도 조금은 나왔고 마네킹에서도 조금은 나왔고 ...... 그렇게 나온 조금씩의 어떤 것들이 뭉친 덩어리였음을 저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숙이의 좁은 어깨를 보고 있는 동안에 나는 깨달았다.
p.214 《다산성》
여느 때엔 바라봄의 대상이 되어 있던 곳에 자리를 잡고 바라보고 서 있던 그곳을 본다는 것은 신기하고 즐거운 일이다. 그것이 여행이라고 하는 것일까.
p.218 《다산성》
꿈보다 해몽이라 했던가. 김승옥 작가의 단편소설집 <무진기행>을 읽으며 그의 글솜씨에 감탄한 만큼이나, 책 마지막에 실린 김미현 평론가의 [서울의 우울]을 읽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내가 추상적으로 느낀 감정들을 세련된 언어의 글로 표현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이 단편소설들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충격이 단순히 평론의 수준이 높고 낮음에 있어서 격차를 느꼈다기보다는 나와 완전히 색다른 위치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의 새로움 같은 것이었다.
김미현 평론가에게 '김승옥'이란 [서울의 우울]로 요약할 수 있다. 1930년 경성을 지나 1960년대 서울에 살게 된 사람들. 그 속에서 느껴지는 근대화의 잔인함을 이야기하지만, 근대화란 결국 '남'이 아닌 '나' , '우리'가 아닌 '나'의 탓임을 자각함으로 인해 어떠한 합리화도 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근대화를 만든 것이 인간이니 근대화를 책임지는 것도 인간의 몫이라는 의식을 '김승옥' 안에서 발견한다.
나에게 '김승옥'은 '해방'으로 다가왔다. 수능으로부터의 해방, 글쓰기로부터의 해방, 키보드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근대화의 잔인함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내가 해방을 이야기하니 뜬금없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소설 속이 아니라, 소설을 읽고 있는 나의 상황에서 엄청난 해방감을 느꼈다. 《무진기행》이나 《서울 1964년 겨울》은 수능을 준비하는 동안 지문으로 만났던 소설들이다. 수험생으로 지내던 시절, 문제에서 단편적으로 만났던 소설들을 편안한 마음으로 읽고 있으니 '아, 내가 드디어 수능의 껍질을 벗고 한 단계 성장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서울 1964년 겨울》은 내가 지문으로 만난 적 있는 작품이란 사실도 잊은 채 쭉 읽다가 결말의 부분을 읽고, 예전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전율이 이는 감정 같은 걸 느꼈다.
편하게 글을 읽다보니 이른바 '국어', '글쓰기'에 대해서 해방감을 맛볼 수 있었다. 그동안 글을 써오면서 글 전체의 구조라거나 간결하고 명료한 문장 적기에 신경 쓰던 마음이 해방됨을 느끼고 있다. 김승옥 작가의 유려한 - 하지만 마치 도시에 사는 평범한 아무개 씨가 작성한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 문장을 읽고 있다 보면, 내 마음대로 쓴 글도 사실을 꽤 유려하게 물 흐르듯이 읽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진 것이다. 덕분에 예전의 글쓰기보다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주욱 -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아마 한 문장의 평균 길이도 예전의 글보다 길지 않을까 싶다. 이런 편안한 글쓰기를 하는 데는 그동안의 꾸준한 글쓰기도 도움이 되었을 거다. 마치 매일 하는 러닝 덕분에 다리가 유연해지고, 가볍게 러닝 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듯이, 꾸준한 글쓰기는 나를 편안한 글쓰기로 이끌어줬다.
글쓰기가 편안해진 덕분에 나는 '일단 쓰고, 계속해서 고치자'는 글쓰기의 진리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러자 키보드 앞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글쓰는 일이 너무나 편안하고 재밌기 때문에 이 글을 싸지방에서 타이핑하든, 모나미 153 볼펜으로 노트에 쓰고 있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졌다. 전자기기를 이용해 글을 쓰겠다는 생각이 사라지자 우리 부대 일과 중간의 쉬는 시간마다 틈틈이 글을 쓸 시간을 얻었다. 편안한 글쓰기가 더 많은 글쓰기는 만들고, 더 많은 글쓰기는 편안한 글쓰기를 만든다. 매일 하는 운동이 내 몸을 발전시켜 주고, 성장한 내 몸을 느끼며 다시 운동할 용기를 얻는다. 재미는 꾸준함을 만들고, 꾸준함은 재미를 만든다. 꾸준함이 중요하다는 게 이런 게 아닐까?
꿈보다 해몽이라 했던가. 누군가 소설 속에서 [서울의 우울]을 발견할 때, 나는 소설 밖에서 해방감을 느꼈다. 이런 게 바로 책이 주는, 소설이 주는 즐거움이 아닐까? 소설은 그저 '이 의미 없는 삶에 의미의 조명을 비춰'주고 있을 뿐이다. 끝.
소설이란 추체험의 기록.
있을 수 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도식,
구제받지 못한 상태에 대한 연민,
모순에 대한 예민한 반응,
혼란한 삶의 모습 그 자체.
나는 판단하지도 분노하지도 않겠다.
그것은 하느님이 하실 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의미 없는 삶에
의미의 조명을 비춰 보는 일일 뿐.
1980년,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