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서양미술사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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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건 간접경험일까? 나는 독서 또한 직접경험의 일부이자 한 종류의 '여행'이라고 믿게 되었다. <서양미술사>를 읽는 동안 나의 '마음'은 긴 여행을 떠났다. 비록 몸은 부대 안에 머물렀지만, 마음만큼은 고대 문명으로, 피렌체로, 파리로 여행을 떠났다. 여권을 챙겨 비행기를 탈 필요도 없었고, 중대장님에게 휴가 계획서를 제출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책을 읽고 있으면, 나의 마음은 저 멀리 어딘가로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일상이 즐거워졌다. 일상 속에서 책을 읽고 있는 장소는 바로 '여행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코로나 19 예방적 관찰을 위해 동아리실에서 생활할 때도, 전우들이 모두 잠들고 몇몇 사람만 북카페에 모여 연등을 할 때도,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의 여행이 지나갔다. '언제 다 읽나..' 싶게 두꺼웠던 책은 어느새 끝을 봤다. 내 생애 가장 길었고 가장 자유로웠던 여행이 끝난 것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여행에서 얻어온 내용을 정리해보자. 크게 3가지가 '없다'는 내용으로 정리해봤다.
그림이 실물처럼 보일 필요는 없다
'저건 도대체 무슨 그림이지?' 실물처럼 보이지 않고 '정확성이 떨어지는' 그림을 접할 때 거부감이 들곤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림의 정확성에 대하여 논하기 전에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먼저 미술가가 사물의 외형을 '일부러' 변형시켰는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본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에 집착하지 않았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림이 실물처럼 보일 필요는 없다. 미술의 역사 속에서, 실물을 '일부러' 변형시킨 이유는 여러 가지 있었다. 미술의 목적은 여러 시대와 미술가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집트인들은 '알았던' 것을 그렸고, 그리스인들은 '본' 것을 그렸으며, 중세의 미술가들은 '느낀' 것을 그림 속에 표현했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인에게는 아름다움보다 완전함이 중요했다. 모든 것을 가능한 한 분명하게, 영원하게 보존하는 것이 미술가의 과업이었다. 그래서 보이는 대로의 자연을 그리는 대신, 들어가야 한다고 '아는' 모든 것이 들어가도록 그림을 그렸다.
고대 이집트인의 그림처럼, 우리는 보는 것보다 '아는 것'에 집착하곤 했다.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정확하게 그려진 그림이 더 이상했을지도 모른다. 뒤에 있는 사물을 작게 그리거나 팔 하나가 그림에서 사라지는 기법은, 이집트인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도 '아는 것'에 집착하곤 한다. 혹시 '말이 달리는 모습'을 본 적 있는가? 달리고 있는 말의 다리는 너무나 빨라서, 마치 앞다리와 뒷다리가 끼리끼리 같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말이 달리는 모습은 우리가 '보는 대로' 그려왔다.
하지만 카메라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이제서야 말이 달리는 모습을 제대로 포착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 사진이야말로 '보이는 대로' 말을 표현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말이 달리는 모습은 사진보다 그림에 가깝게 보이기도 한다.
결국, 그림이 실물처럼 보일 필요는 없다. 미술가들은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그림을 변형할 수 있으며, 우리는 때때로 보는 것보다 아는 것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미술에서 진보를 이야기할 수 없다
새로운 발견은 새로운 어려움을 낳는다. 미술의 발전은 과학의 발전과 다르기 때문이다. 미술가의 수단이나 기술적인 방법은 발전할 수 있지만, 미술 그 자체는 과학이 발전하는 방법처럼 발전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의 화가들이 마주했던 문제를 살펴보자. 르네상스 이전, 중세의 화가들은 실감 나게 그림을 그리는 '정확한 소묘'의 규칙에 대해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화면 전체에 인물을 배치하며 완벽한 구성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 접어들고, 현실 세계를 생생하게 그릴 수 있게 되면서, 인물들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발생했다. 생생하게 그려진 인물들은 중세의 인물들처럼 조화롭게 배치되지 않았고, 단조로운 색조의 배경에서는 뚜렷하게 부각되지도 않았다.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의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에서는 이런 상황이 잘 드러난다. 이 미술가는 소묘와 구성,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한 16세기 대가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의 그림에 비하면, 어딘가 딱딱하고 둔해 보인다.
이처럼 미술에 있어서 새로운 발견은 새로운 어려움을 낳았다. 단순히 미술적인 수단이나 기술에 관한 어려움은 아니었다. 새로운 발견이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면서 겪는 어려움도 많았다. '바로크', '인상주의'처럼 미술 양식에 붙여진 이름은, 사실 그들을 무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붙여진 경우가 많았다.
'고딕'이라는 단어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미술 비평가들이 13세기의 양식에 대해 야만적으로 서술하기 위해서 사용했다. '매너리즘'은 17세기 비평가들이 16세기 후반의 미술가들을 비난하는 데 사용했다. 미술가들이 미켈란젤로의 수법(manner)만을 모방했다고 생각하며 불렀던 말이다.
'바로크'라는 말은 터무니없다거나 기괴하다는 의미다. 17세기의 예술 경향에 대해 반감을 품었던 후대의 비평가들이, 고대 그리스·로마 건축의 엄격한 규칙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사용한 단어였다.
인상주의자(Impressionist)의 출발은 가장 흥미롭다. 모네 주변의 젊은 풍경 화가들은 그들의 비전통적인 그림을 '살롱 전'에 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들은 1874년 함께 모여 어느 사진작가의 스튜디오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다. 그 전시회에는 <인상 : 해돋이>라는 제목이 달린 모네의 그림이 들어있었는데, 비평가 중 한 사람은 이 그림의 제목이 특히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시회에 참가한 그룹 전체를 '인상주의자들'이라고 조롱하며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인상주의자'란 명칭이 가진 조롱의 의미도 곧 사라졌다. 얼마 후에는 화가들 스스로가 인상주의자라는 명칭을 받아들였고, 그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미술에 규칙이란 없다
'좋아하는 미술 작품이 있으신가요?' 나는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를 참 좋아한다. 그런데 왜 좋을까? 어떤 미술 작품을 두고, 왜 그 작품이 위대한지 이유를 설명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위대한 미술 작품이라면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는 기준이나 규칙이 없기 때문이다.
미술 작품의 위대함과 아름다운 균형은 '느낌'으로 만든다. 그 느낌을 찾기 위해 미술가들은 이렇게 저렇게 작품을 변형해보고 새로운 작업을 시도한다. 미술가들의 이러한 노력은, 어떠한 공식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미술의 법칙을 공식화하려는 노력은 항상 실패를 반복해왔다.
재밌는 예로, 레이놀즈와 게인즈버러의 일화가 있다. 레이놀즈가 주장하기를, 푸른색은 전경에 칠해서는 안 되고 먼 거리의 배경이나 희미한 언덕을 그리는 데만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그의 경쟁자 게인즈버러가 등장해 <푸른 소년>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소년이 입고 있는 옷을 통해, 전경에 푸른색을 칠한 그림이다. 하지만, 푸른색은 온화한 갈색 배경과 대조적으로 두드러지며 아름답게 보인다.
미술에 객관적인 규칙이 없다고 하니 '작품 감상' 또한 전적으로 주관적인 행위일까? 그렇지 않다. 개인의 느낌이나 취향에 상관없이 '뛰어난 작품' 또한 존재한다. 우리는 각자의 취향에 따라 루벤스나 라파엘로를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두 화가 모두 위대한 대가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는 각자의 취향이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많은 작품을 감상할수록, 각각의 작품이 어떤 장점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감각을 발전시킬 수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이나 양식 속에서도 장점을 찾다 보면, 우리의 작품 감상이 전적으로 주관적인 행위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술의 위대함에 대한 객관적인 규칙은 없지만, 작품 감상이 전적으로 주관적인 행위는 아니다. 이 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는 각각의 작품이 가진 '위대함'을 찾아내면서도, 자신만의 '좋고 싫음'을 판단할 수 있는 감각이 필요하다. 이러한 감각은 '참신한 마음'으로부터 출발한다. 참신한 마음이란, 혼자서 작품을 감상하며 느끼는 생각이나 감정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눈으로 미술 작품을 바라보아야 감각을 기를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눈으로 작품을 감상하고, 감각을 기르기 위해 <서양미술사>를 읽어보자. 미술의 역사를 알아갈수록, 미술가들이 왜 독특한 표현 방법과 특정한 효과를 사용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미술가들의 마음을 이해할수록, 자신의 눈으로 감상하는 방법을 익힐 수 있다.
누군가는 <서양미술사>에서 얻은 '지식'을 자랑하기에 바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지식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온다. 오히려 자신만의 참신한 시각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일이 훨씬 어렵고 값진 일이며 '지혜'를 쌓는 일이다.
부끄러워 할 필요 없다. 누구도 미술에 대해 다 알지 못한다. 그래서 미술에 대한 배움은 끝이 없다. 우리는 참신한 감상을 통해서 미술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어렵고 값진 일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얻게 될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사실 <서양미술사>에는 정말 많은 이야기가 있다. 어떤 부분을 골라 서평을 써야 할지 많이 고민했고, 내 나름대로 생각하기에 '결론'이라 부를만한 내용 세 가지를 뽑아봤다.
그림이 실물처럼 보일 필요가 없고, 미술에 진보란 없고, 미술에 규칙이 없다. 이 세 가지 주제는 나의 게으른 고정관념을 깨고 눈이 번쩍 뜨이게 했다.
어서 빨리 '참신한 마음'으로 미술을 감상하고 싶다.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고, 다시 미술관에 갈 수 있는 날이 오면 흐뭇하게 미술을 감상해야지. 끝.
결국 우리는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형태와 색채가 '제대로' 될 때까지 그것을 조화시키는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드물기는 하지만 어중간한 해결 방식에 머물지 않고 모든 안이한 효과와 피상적인 성공을 뛰어넘어 진정한 작품을 제작하는 데 따르는 노고와 고뇌를 기꺼이 감내하는 뛰어난 남녀들이다.
미술가는 계속해서 태어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미술이 존재할 것인지 아닌지는 적지 않게 우리들 자신, 즉 일반 대중의 태도에 달려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갖느냐 아니냐에 따라, 편견을 갖느냐 이해심을 갖느냐에 따라 미술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전통의 흐름이 끊이지 않게 하고 미술가가 과거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이 미술이라는 보물에 귀중한 것으로 하나 더 보탤 수 있게 하는 것도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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