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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정리를 시작해보자 (2021.01)

군만두서비스 2021. 2. 1.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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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자취방 냉장고와 타이탄의 도구들)


 ‘정리?’ 벌써 무섭다. 정리라는 두 글자 단어만 보아도 내 글에 벌써 거부감을 느끼고 페이지를 넘기는 전우들이 계실까 봐 걱정이다.

최소한, 우리 생활관에서 나와 함께 지내는 전우들은 내가 “정리하자!”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표정이 굳어지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생활관 전우들에게 정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았지만, 점호 시간 관물대 정리를 생각하거나 상급자에게 정돈되어 ‘보이기’ 위해 하는 게 정리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우리 생활관뿐 아니라 수많은 전우에게 정리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꾸미는’ 일이요 그래서 ‘지루한’ 일이라고 느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정리야말로 우리의 가장 정직한 모습을 만나고, 삶에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 무엇이든 정리하는 과정에서 ‘전체’를 마주하기 때문이다. 

 나는 입대 전에 2년 정도 자취를 했는데, 내 방 냉장고를 정리할 때마다 ‘정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일단 냉장고를 정리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면, 냉장고 속의 모든 음식을 조사한다. 자취생의 냉장고 속에는 어제 먹다 남은 배달음식부터, 작년 가을에 부모님이 보내주신 김장김치까지 여러 음식으로 채워져 있다. 나는 이 더러운 냉장고를 애써 외면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냉장고를 정리하며 ‘전체’를 마주하는 순간, 내 방의 냉장고는 이만큼이나 더러웠다고 정직하게 고백해야 했다.

 냉장고 정리가 ‘정직함’을 찾아가는 정리의 과정이었다면, 내가 글을 쓰고 생각을 정리하며 느끼는 감정은 ‘즐거움’에 가깝다. 나는 군대에 온 뒤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책을 읽는 시간 동안 비록 몸은 부대 안에 머물러 있을지라도, 내 마음은 시공간을 넘나들며 영외의 세상으로 휴가를 다녀오기 때문이다. 특히, 책을 읽고 나서 그 내용과 느낀 점을 정리하여 글로 옮기다 보면 엄청난 ‘즐거움’이 따라온다. 냉장고 속 음식처럼 숨겨져 있던 ‘진짜 나’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 전에 <타이탄의 도구들>이라는 진중문고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여, 글로 옮겨 적었다. 책에 대한 생각을 글로 적다 보면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싶은 새로운 모습들을 발견한다. 내가 감명 깊게 읽었다고 생각했음에도 문장 하나 쓰기 힘든 내용이 있는가 하면, 별생각 없이 읽었던 부분을 쓰던 중에 나도 모르게 투머치토커가 되어 끝없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이런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여하튼, 그렇게 글을 쭉쭉 쓰다 보면 나도 생각하지 못했던 나의 모습이 툭툭 튀어나온다. 그동안 전우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이며 지냈는지, 불행할 줄만 알았던 군 생활에서 얼마나 좋은 일을 많이 겪었는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이런 생각들을 마주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집에 가면 냉장고를 정리하자거나, 지금 당장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누군가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정리를 벗어나서, 스스로 즐거움을 찾기 위해 정리를 시작하자는 이야기다. 우리는 한 번쯤, 느리게 흘러가는 국방부 시계를 한탄하며 자신의 군 생활과 전역 후 인생에 대해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본 적 있을 것이다. 혹은 훈련소에서 받은 편지를 정리하여 추억 속에 남겨두었거나, 전역을 앞두고 군수품을 정리하며 그 속에 담긴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뭐, 어떤 정리라도 좋다. 지금 우리 모두 정리를 시작해보자. ‘굳이? 지금? 뜬금없이?’라는 생각이 들어오는 지금 이 순간에 펜이든 스마트폰이든 서랍 속 물건이든 손에 잡고 정리를 시작해보자. ‘정직함’과 ‘즐거움’을 찾기 위해 스스로 시작한 정리에서, 어떤 새로움을 만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1월호 주제 : 정리의 힘!

새로운 출발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정리’라고 합니다. 쓸모없지만 버리지 못하는 것들, 아무 생각 없이 수십 년간 쌓아둔 것들을 정리만 해도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거죠. 이는 물건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우리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사람과의 관계도 정리가 필요합니다. 새해를 맞아 인생을 바꿀 기회, 다양한 정리에 관한 장병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퇴고록

HIM 매거진에 처음으로 실린 글입니다. 자랑스러운 글이죠. 고등학교 교내잡지에도 이름을 못 올렸던 제가 이만큼이나 성장했다고 보여주는 글입니다.

물론, 아쉬움도 있습니다. 이 글을 작성할 당시에는 매일매일 '글쓰기'에 치여 살았거든요. 바쁘다는 핑계로 맞춤법 검사 정도만 마치고, 급하게 기한을 맞춰 송부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래서인지 번역투의 문장과 필요없이 긴 문장이 많습니다. 원문에서는 제목도 훨씬 뜬금없이 지었습니다. 그 대신에 데스크에서 말끔하게 입혀주신 제목으로 출간되었네요.

그래도 뿌듯합니다. 어엿한 인쇄매체에 제 이름을 걸었고, 이렇게 퇴고록까지 적고 있거든요. 1월에 아쉬웠던 점들은 2월에 고치면 됩니다. 다음 달에 다시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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