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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공항에서 일주일을 본문
우리는 모든 것을 잊는다. 우리가 읽은 책, 일본의 절, 룩소르의 무덤, 비행기를 타려고 섰던 줄,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 등 모두 다. 그래서 우리는 점차 행복을 이곳이 아닌 다른 곳과 동일시하는 일로 돌아간다. 항구를 굽어보는 방 두 개짜리 숙소, 시칠리나의 순교자 성 아가타의 유해을 자랑하는 언덕 꼭대기의 교회, 무료 저녁 뷔페가 제공되는 야자나무들 속의 방갈로, 우리는 짐을 싸고, 희망을 품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 욕구를 회복한다. 곧 다시 돌아가 공항의 중요한 교훈들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p.205
유시민 작가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모든 내용을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아직도 기억하는 내용이 하나 있다.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기 위해서, 어떻게 죽을 것인지 고민하는 내용이다.
완전 반대의 경우도 있다. <자살 심리치료의 실제>에서는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과 만날 때일수록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라고 여러 번 강조한다. 삶에 대해 이야기할수록 죽음을 이야기하게 되고,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수록 삶을 이야기하게 된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림자를 찾으려 할수록 빛을 찾게 되고, 빛을 찾으려 할수록 그림자를 찾게 된다고 표현해보면 괜찮은 비유이려나?
여하튼 <공항에서 일주일을>도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공항은 누군가, 어딘가로 계속해서 떠나는 곳이다. 작가는 공항에서 이런저런 '떠남'과 마주하면서, 역설적이게도 우리 삶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알랭 드 보통은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일주일 동안 상주작가로 활동했다. 공항 안에 있는 호텔은 물론이고 보안검색대, 기내식 공장, 수하물 처리 시설처럼 구석구석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글을 썼다. 책을 펼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여행 가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솟구쳤다.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모습이며, 북적이는 항공사 카운터, 세계 여러 도시를 담고 있는 전광판처럼 공항 이곳저곳의 모습을 경쾌한 문체로 담아낸 덕분에 그동안 공항에서 느낀 설렘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 아, 나도 새벽 잠 설치며 공항버스 타고 인천공항에 들렀다가 런던 히드로까지 잘 다녀올 수 있는데 말이다. - 책 앞부분만 읽어도 알랭 드 보통이라는 사람이 글을 참 찰지게 쓰는구나 생각하며 재밌게 읽었다.
술술 책을 읽어가다가도, 몇몇 부분에서는 손을 놓고 생각에 잠겼다. 우선 재미있었던 건 기내식. 그동안 인류는 풍족한 음식을 바라면서 하늘을 향해 제사를 올리곤 했는데, 이제는 우리가 음식을 가지고 하늘에 올라간다니. "인공적인 것과 유기적인 것 사이에 최대의 긴장이 이루어지고 있다"라는 말이 찰지게 맞아떨어졌다.
이러한 긴장이 있는가 하면 참 이상한 부조화도 많다. 하늘에 제사를 드리던 사람들의 시대에, 우리가 무거운 쇳덩어리에 사람과 음식을 가득 담아 하늘로 보내고 난 뒤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용서하거나 불끈 성질을 낸 것을 사과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 이렇게 고생을 할 것이라고 누가 알았을까? 우리는 여행을 떠나 도착한 그곳에 행복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곤 한다. 김영하 작가의 말처럼 그곳에는 정리할 필요 없는 편안한 호텔 객실과, 낯선 거리의 모습, 흥미로운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여행 가서 싸우는 사람이 엄청 많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여행에서 얻는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는 당장 우리 자신과, 그 옆에 있는 사람들의 기분이 좋아야 한다. 우리가 주변 사람들과 공감하고 소통하고 배려할 수 없다면 여행지의 매력은 더 이상 행복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글을 쓰고 나니,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여행을 마치고 인천공항에 내리는 순간의 감정이랄까.
언젠가 지금으로부터 긴 세월이 흐른 뒤, 어른이 된 자식은 일상적인 출장을 떠나기 전에 늘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할 것이며, 그러다 집행유예는 어느 순간 끝이 날 것이다. 한밤중에 맬버른의 한 호텔의 2층에 있는 방으로 전화가 걸려와, 세계 반대편에서 아버지가 치명적인 발작을 일으켰으며, 의사들은 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 그날 이후 이제 어른이 된 소년은 도착 라운지에 늘어선 사람들 속에서 늘 빠져 있는 얼굴 하나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pp.192-3